저성장의 시대, 도쿄는 ‘새로운 소비’를 만든다

저성장의 시대, 도쿄는 ‘새로운 소비’를 만든다

 

 

인구 감소·Z세대·고령화 속에서 일본 기업이 시장을 재정의하는 법

저성장과 인구 감소는 더 이상 미래의 위험이 아니다.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은 이 변화의 가장 앞선 실험장이며, 도쿄는 그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변화의 징후를 통해 “시장이 변화할 때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핵심은 단순하다. 수요를 기다리지 말고, 맥락을 바꿔 시장을 다시 정의하라는 것이다.

 

여행을 못 해도, 여행 시장은 존재한다

코로나19로 여행이 멈췄던 시기, 대부분의 여행 관련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여행 안내서인『지구를 걷는 법 도쿄편』은 예외였다. “언젠가는 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타겟 설정을 통해, 이 책은 출간 후 1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여행객이 아니라 ‘여행을 상상하는 사람’을 고객으로 재정의한 결과다.

이 흐름은 도감 시리즈로 확장됐다. 세계의 영화 촬영지, 세계의 맛집을 다루는 콘텐츠는 이동이 아닌 상상과 축적의 소비를 겨냥한다. 이는 저성장 시대 소비의 본질이 ‘행위’가 아니라 ‘의미’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유하지 않아도, 경험은 필요하다

도쿄의 피트니스 센터 ‘초코잡’은 운동기구가 없다. 대신 골프 연습, 세탁, 노래방, 필라테스 같은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1인 단위로 제공한다. 이는 헬스장이 아니라 ‘생활 인프라’에 가깝다. 소비자는 더 이상 특정 목적을 위해 이동하지 않는다. 일상에 스며드는 서비스를 원한다.

편의점에서 치킨을 먹으며 1만 원 이하로 하이볼을 마시는 ‘술의 미술관’, 로고를 제거한 가전제품, 캔을 따면 바로 생맥주가 되는 아사히 슈퍼드라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브랜드를 과시하기보다 불편을 제거하는 경험이 소비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소비하지 않는 Z세대를 설득하는 방법

Z세대는 소비를 회피한다. 대신 선택의 부담을 싫어한다. 일본에서 가챠샵, 향수 구독 서비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항공권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선택을 ‘운’에 맡김으로써 후회를 줄이는 전략이다.

여행하지 않는 젊은이를 위한 호텔, 술을 마시지 않는 Z세대를 위한 바도 등장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지 않고, 넷플릭스를 ‘빨리 보기’로 소비하는 ‘타이파(타임 퍼포먼스)’ 현상은 시간 효율이 가치 판단의 핵심 기준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격 대비 성능이 아니라 시간 대비 만족도다.

 

공간은 더 이상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도쿄에서는 특정 콘셉트를 내세운 임대주택이 확산되고 있다. 모든 방에서 악기 연주가 가능한 뮤지션 전용 주택,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쉐어하우스는 주거 공간을 ‘생활 플랫폼’으로 전환시킨 사례다.

아사히맥주의 몰입형 체험시설 ‘슈퍼 드라이 고 라이드’는 맥주를 파는 곳이 아니다. 브랜드 세계관에 들어가는 입구다. 더 나아가 물건을 팔지 않는 점포가 늘고 있다. 이 공간들은 브랜드에 임대되고, 제품은 전시되며, 고객의 행동 데이터가 축적된다. 매출보다 데이터와 관계가 우선하는 유통이다.

 

고령화는 위기가 아니라 산업이다

빈집을 무상에 가깝게 거래하는 ‘제로엔 물건’은 일본 고령화의 단면이다. 그러나 이를 역사와 문화의 거점으로 재해석하면 지역을 살리는 자산이 된다. 노견을 돌보는 전문 홈, 반려동물 질병을 예방하는 펫테크 산업 역시 고령화 사회의 새로운 수요를 포착한 결과다. 고령화는 소비 축소가 아니라 소비 구조의 전환이다. 문제는 연령이 아니라 관점이다.

 

줄어드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

돈키호테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돈키호테 여기서만 살 수 있는 것’을 만든다. 젤리돈키, 오징어돈키 같은 특정한 제품류의 다양한 제품을 모두 판매하는 즉, 극단적으로 좁은 타겟팅 전략이 그것이다. 패밀리마트는 편의점에서 패션쇼를 연다. PB상품은 제조사가 아닌 고객과 함께 만든다. 이러한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구가 줄어들수록, 시장은 더 세분화되고 깊어진다. 저성장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규모의 확장이 아니라 맥락의 재설계다. 도쿄는 이미 그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은 한국을 포함한 모든 선진국 경제가 마주하게 될 미래의 예고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도쿄트렌드2025』, 일본 현지 트렌드 분석서
  • 일본 경제산업성(METI), 인구구조·소비행태 변화 보고서
  • 일본 총무성 통계국, 고령화·가구 구조 관련 통계
  • 닛케이신문, 아사히·돈키호테·패밀리마트 관련 보도
작성 2025.12.29 08:45 수정 2025.12.2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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